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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the ‘지나가는 생각들’ Category

그래요. 한국에는 9월에 다녀왔죠. 그리고 지금은 3월이라죠. 그러니깐 이게 지금 6개월 전 사진이란 말이죠. 엄…

암튼, 사진 제에에에일 잘나온걸로 하나 엄선해서 올린다고 했었는데, 이건 뭐, 암만 눈씻고 찾아봐도 올릴만할게 없네요.  이게 그나마 제일 날씬하게 자연스럽게 나왔다고나 할까요.

3월이다보니 벌써 알러지 시작인가요. 왜 이리 자꾸 눈에서 눈물이… 훌쩍.

이번 사진은 좀 소심하니 작게 올려보아요. 감히 크게 해서 올릴 배짱은 없네요.

암튼 저 약속 지켰습니다? 그럼 이제 사진 보세요. 아 챙피해.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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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안쓸때엔 하고 싶은 말들이 너어무 많았었는데, 요즘 막상 뭘 좀 써볼려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보면 머엉하니 먼산만. 난 드디어 백치가 된건가효. 정말 그런건가효.

2. 그래, 뭐든지 “적응”의 시간이란게 필요한거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럼 적응은 어떻게 하나효. 그냥 생각나는대로 쓰다보면 되나효. 정말 그런건가효.

3. 이거 진짜 큰일일쎄. 흠…

4. 새해가 시작되고 일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벌써 내일이 이월이네. 아이구야.  언제부터 나의 생활 단위가 주일이 아닌 달로 변했는지는 잘 기억도 안난다. 암튼 요즘의 내 생활 단위는 한달이다. 일도 한달 단위. 렌트비나 빌들도 다들 한달 단위. 나의 개인적인 계획들도 다들 한달 단위. 일주일이 너무 짧다. 그 짧은게 네번 휙휙 지나가면 한달이 벌써 지나갔고. 그냥 일년 전체가 한번에 보이는 달력을 하나 구해서 그걸 플래너로 써야될것 같다. 이번 해도 너무 빨리 지나갈것 같아 좀 불안하다.

5. 어제는 영화 “완득이”를 봤다. 뭐, 쪼오끔 억지스런 설정에도 불구하고 잔잔하면서 훈훈한 영화. 특히 마지막 부분에 집에서 벌이는 술자리를 볼땐 나도 거기에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밥도 먹고, 술도 조금 마시고, 흥이 나면 일어나서 노래도 좀 부르고 춤도 좀 추고. 그래도 다들 재미있어 하는. 소외되는 사람 없이.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다들 깔끔하게 집에 가서 뻗어주는. 술기운을 빌어 괜히 쓸대없는 소리나 하고, 감히 무례한 소리나 내뱉고, 괜히 목소리 높여가며 시비거는 그런 진상들은 없는. 아… 난 이젠 그런건 진짜 못 받아주겠다. 몇달전에 우리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때 내가 결국 참다참다 그 자리를 (한 십년만에 처음으로) 엎어버렸는데, 난 결국 누군가에게서 “성숙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게 과연 성숙이랑 관련된 일이었을까. 난 정말 성숙하지 못한 거였을까. 씨발.

아, 그때 생각하니까 잠깐 열기운이 머리위로 모락모락. 잠깐 진정하시고. 흠흠.

6. 오늘 점심시간에 나탈리랑 타겟에 갔는데 차를 주차하고 나니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이 추운날. 부들부들 떨면서. 그 사람은 알콜중독자들을 돕는 단체에서 (아마도) 봉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단체에서 만든 빵이나 플랜같은걸 팔고 있었다. 목에 건 아이디를 보여주며 자기가 모으고 있는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를 상세히, 그리고 열심히 설명해 줬는데, 기셰르모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의 빵을 난 안 사 줄수가 없었다. 그가 왠지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왠지 챙피했다. 도데체 언제 실천할건데, 응?

7. 이건 좀 로맨틱/나이브한 상상일지도 모르겠으나…가 아니라 사실인데… 난 나중에 봉사활동을 동물 쉘터에서 하고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다. 물론 현실은 쉘터에 들어온 개나 고양이를 목욕이나 시켜주고, 틱 같은거나 띄어주고, 밥이나 주고, 산책이나 시키고, 같이 놀아주고… 뭐 그런건 아니겠지. 아마도 보기 싫은걸, 아니, 차마 보지도 못하겠는걸 많이 보게 되는게 현실일게다. 현실은 항상 상상보다 처절하니까. 내가 언젠가 수의사인 쌍둥이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보조들이 병원에서 무슨 일들을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물어 봤을때 갸는 그냥 웃었었다. 어느 방송 스페셜에서 보여줬던 버려진 개들의 이야기도 겨우겨우 본 내가, 돌고래 영화 “The Cove”도 겨우겨우 보다가 결국 끝까지 못본 내가, “고양이 춤” 같은 담담한 영화도 겨우겨우 본 내가 과연 그런 일을 할수 있을까.

8. 고양이 키우고 싶어 미치겠다. 자기 애를 낳으면 남의 애도 예뻐보인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이게 딱 그런 짝이다. 이 세상의 모오든 고양이들이 다 예뻐 죽겠다. 나의 고양이 앓이를 아는 남편님은 내 몸부터 추스리라는 어명을 내리셨다. 그래서 난 빨리 나아야 한다! 그때까지는 나의 대리만족의 대상인 불쌍한 아가는 나의 물고 빨음에 점점 닳아 없어지겠지. 내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는 여우새끼. 자기 엄마 아빠보다 나한테 오랫동안 잘 안겨 있는 모습에 아가 엄마 아빠는 기막혀하거나 질투하는데, 난 요즘 그걸 완전 즐기고 있다. 이쁜놈.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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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해였다. 나를 비롯해 나의 가족들에게도.

울 어무이 아부지는 드디어 비지니스를 접으셨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터라 온 가족이 쌍수를 들어 환영한 일이지만 막상 은퇴를 하신 두분은 지금 집에서 심심해 돌아가시기 직전이다. 평생을 열심히 일하신 분들이시니 이해도 가고 걱정도 된다. 나 자신도 일을 안하는 내 자신을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두분은 가을엔 한국에서 두 딸들을 일주일 간격으로 시집을 보냈다. 그리고 한국에 간김에 이런저런 건강검진을 받으셨는데, 깡깡 마른 울 아빠는 의외로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엄마는 목 디스크 수술을 받고 오셨다. 예전 세탁소할때 팔을 많이 써서 오십견이 왔나 했었는데 어깨가 아니라 목이었나보다. 암튼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와서 참 다행이다. 아빠는 담배를 한동안 끊었었고 (귀엽게도) 나한테 자랑하러 전화까지 하셨었는데, 방금 통화한 엄마의 제보에 으하면, 아빠가 쓰레기 버리러 갈때 몰래몰래 피우므로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다 하신다. 참 여전한 울 엄마 아빠시다.

내 쌍둥이 언니 “갸”는 나의 결혼식 일주일 뒤에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뭐, 일부러 날짜를 맞춘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하나는 경주에서, 하나는 부산에서. 암튼 가까운 날짜탓에 오랜만에 한국에 나가신 울 부모님은 돌 하나로 새 두마리를 잡으셨지. 이런 효녀들을 봤나.

난 다들 알다시피 결혼을 했다. 그 전년도 12월 까지도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1월 말쯤엔 판사님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를 일이라니깐요. 둘이 살림을 차린다고 이사 몇번 하고, 한국에 가서 결혼식을 하고, 돌아와서 이것저것 하다가, 차 사고가 나서 치료를 받다보니 또 일년이 그냥 확 지나가 버렸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찌보면 허무하기도 한 일년이다.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들도 생겼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선 결혼을 하니 정신적으로 안정이 팍 되면서 더이상 솔로일때 느꼈던 외로움/불안감/쓸쓸함 같은 감정들이 없어졌다. 항상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두발을 땅에 단단히 붇히고 서있는 기분이다. 꼭 꿈에서 깬것 같다. 많은 것들이 선명히 보이고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었다. 난 더 성숙해졌고, 더 이해심이 많아졌고, 더 너그러워진것 같기도 하나, 또한 어떤것들에 대한 싫고 좋음은 더더욱 확실해져서 어떻게 보면 더 날카로와지기도 했고 참을성도 없어졌다. 특히 지난해에 굉장히 싫어진게 분명한 것들로는, 쓸데 없고 남에게 도움도 안되는 오지랍과, 남에게 마음의 깊은 상처를 남기는 생각없는 말들과, 술자리 하면 떠올리는거 전부. 전에 종혁님이 쓴 술자리에 대한 포스팅을 읽고 격하게 동의했었는데 덧글은 못남겼다. 암튼 그런것들. 그래서 난 “북촌방향”도 모락모락 피어나는 짜증을 겨우겨우 참으며 봤다. 피식.

인간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건 나중에 좀 자세히 쓰고싶네. 암튼, 긴얘기 짧게 하자면, 이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별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 이세상 혼자 살겠다는 뜻은 아니고. 흠… 역시 이건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써야겠다. 암튼 그렇다.

저번 년도에 좋았던건… 결혼. 판사님 앞에서 선서 했을때의 떨림. 내 손에 끼어져있는 반지가 주는 든든함. 무서우면서도 설레였던 한국으로의 여행. 오랜만에 본 친척들의 웃는 얼굴들. 내 결혼식날의 해프닝들. 내 쌍둥이 언니네의 둘째고양이 아가. 새로 이사온 집의 창문들. 내가 등산한 동부의 높은 산들. 겨울산행. 아이폰. 붕어사만코. 매일 피는 담배. 매일 마시는 커피. 그리고 매일 보는 내 남편.

저번 년도에 안 좋았던건… 다시 찾아온 몸의 통증. 내 마음에 새로 생긴 상처. 부모님에 대한 걱정. 내 쌍둥이 언니네의 첫째고양이 꼬마의 죽음. 친구. 나와 손발이 착착 맞고 친하게 지냈으나 지금은 회사에서 사라진 Austin과 Bakersfield의 콘트롤러들.

그래도 좋은게 안 좋은것보단 많네. 그리 나쁜 해는 아니였던듯?

요번 해는 흑룡의 해라 하대. 울 집에는 용이 세마리나 있는데. 울 엄마가 그러는데, 작년으로 우리집에서 큰 삼재가 나갔대나 모라나. 용 세마리에다가 쥐띠도 삼재여서 울집에 6대 4로 삼재가 아주 제대로 들었었다고 하대. 요번 해부터는 좋은 일들만 생길꺼라고 밝은 목소리로 새해 초 덕담을 하는 울 엄마에게 난 그럴꺼라고, 정말 이젠 좋은 일들만 생길꺼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그렇게 될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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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몇시간 후면 한국으로 떠난다. 89년 2월달에 떠났으니 거의 23년만이로구나. 흠…

서울시 성북구 정릉1동 16-92호 10통 2반. 세살때부터 살기 시작해 한국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우리 집이다. 파란 대문을 가졌던 집. 아니, 녹색이었던가. 청녹색이었을수도 있겠다. 그 대문 앞에는 계단이 한두개 있었었다. 그 계단은 앉아서 동네 오빠들이 오징어던가 짬뽕이던가, 그런 게임을 하는걸 구경하던 곳이었고, 맞은편 집 옆에 있던 전봇대에 고무줄을 걸어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쉬던 곳이기도 했었고, 그때 기르던 진돗개 갑돌이의 털을 빗어주기도 했던 곳이었다. 가끔 땅위에 분필따위로 그림을 그려 땅따먹기 놀이를 하다가 숨이 너무 차오르면 빨갛게 읶은 얼굴을 식히기도 하던 곳이었지.

그 파란 대문 바로 안쪽으로는 대추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추나무와 집 안쪽에 있던 대추나무에서는 대추가 꽤 많이 열렸었다. 새파랗던 대추들은 아삭아삭하니 맛있었었다. 그 대추들을 땋아서 잘게 자르거나 부수어 소꿉놀이도 꽤 많이 했었지. 하지만 가끔 송충이었던가 쐐기라고 했던가, 그런 징그러운 벌레들이 나무에서 떨어져서 기겁을 할때도 있었다. 가을이 되어 그 새파란 것들이 갈색 점박이로 변할때면 그 맛은 더 달달해 졌었다. 그리고 그 대추들이 거의 다 갈색으로 변할때쯤엔 아빠는 동네 사람들에게 다들 바구니를 들고 오라고 했었다. 런닝 차림의 아빠가 가느다란 대추 나무를 무지막지하게 흔들던 장면은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대추들이 하늘에서 눈처럼 막 떨어지던 장면도. 동네 사람들은 엄마가 나중에 다 나눠 줄것을 알면서도 다들 바구니를 들고 나와 떨어진 대추들을 열심히 주웠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추석전에 그 대추들을 따지 않았을까 싶다. 추석 차례상에 대추가 올라가는게 맞다면. 그렇게 우리 집은 파란 대문의 집과 쌍둥이네 집 이외에도 대추나무 집으로 불렸었었다.

앞집 창훈이네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피아노 학원을 하던 집이 있었다. 피아노를 가르치던 스타일이 맘에 안 들어서 차라리 그집 고양이 새끼들과 놀고 싶었던. 거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내가 종이인형을 사러 들락날락거리던 문방구가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먹던 슈퍼가 있고, 거기서 한참을 더 걸어가면 친절한 약사 아줌마가 있던 약국이 있다. 그 약국을 지나 더 오른쪽으로는 가본적이 없다. 집에서 너무 멀었거든.

앞집 창훈이네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우리 외할머니네가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심심풀이삼아 하던 조그만 구멍가게와 세를 줬다던 복덕방. 항상 할어버지들이 득실득실거리던. 할머니네 구멍가게에서는 가끔 쵸콜렛이나 사탕을 훔쳐 먹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는 그게 굉장히 많이 죄송스러웠었다. 모르겠다, 요번에 가서 할머니한테 고백할지도. 암튼 그 가게를 지나 좀 가면 교회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계속 쭈욱 올라가야하는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 중턱까지밖에 못가봤다. 계속 올라가는건 집에서 너무 멀었거든.

이밖에 집에서 버스로 한정거장 거리에 있던 학교와 엄마를 따라 몇번 가봤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던 길음시장. 그게 내가 한국에 대해 아는거 전부다.

지금의 내가 살던 동네는 빌딩으로 꽉 차있고 고가도로가 들어선, 굉장히 바삐 움직이는 곳이라 들었다. 우리집이 있던 곳도 빌딩이 들어섰을테고 나와 같이 컸던, 우리 아빠의 자랑이었던, 대추나무들도 없어진지 오래일테다. 그렇게 내가 유일하게 알던 한국의 한 장소는 이젠 없어졌다. 그리고 난 이제 한국에는 아는 장소가 하나도 없다.

나는 한국이 항상 무서웠다. 글쎄다… 무섭다라고밖에 설명을 못하겠다. 나는 분명 한국에 대한 생생한 추억이 있다. 그런데 내 추억의 주인공인 그 나라는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서 난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나라만 바뀌었나? 사람들도 바뀌었지. 난 이제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 고민들을 하며 사는지, 그들의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모르겠다. 완전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사람들은 나랑 똑같이 생겼고 나랑 같은 언어를 쓴다. 또 한가지. 한국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한국사람들이다.

상상이 안간다. 그래서 무섭다. 피식.

난 이제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나 JFK 공항으로 간다. 비행기를 타고 15시간동안 몸을 배배 꼬다보면 어느새 한국에 도착해 있겠지. 15시간이라… 길다… 끙…

암튼 그렇게 한국에 갑니다. 2주 있다 와서 소감 올릴께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시길.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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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십대 초중반때 일이다. 그때 같이 놀던 한 그룹의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걔네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도 왠만큼 잘 했으니 1.5세에 속했으나, 당시 아주 티피컬한 1.5세였던 나와는 여러면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1.9세쯤 되는 애들이었다. 우선 라이프 스타일부터가 달랐다. 걔네들은 벌써 학교도 졸업하고 일을 하며 돈을 벌 때였고, 남친이 없던 그녀들은 한달에 한번씩 자기네들끼리 모여 뮤지컬을 보거나 비싼 식당에 가서 분위기 내는걸 즐겨했다. 명품 물건들은 당시 그녀들의 대화에 중심이었고, 난 그녀들을 통해 프라다나 페라가모 따위의 물건들을 처음 구경하기도 했다. 그때 난 투잡을 뛰었었고, 연애도 했었고, 졸업쯤을 맞이해 갑자기 불붙은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서 솔직히 놀 시간따윈 없었는데, 그리고 같이 뮤지컬 가거나 비싼 식당에 갈 돈도 없는 가난한 학생이었는데, 그래서 그녀들이 나를 자꾸 불러 그 그룹에 속하게 하려는게 이해가 안갔었다. 그래도 난 그들의 호의에 대한 고마움에 나름 시간을 내 그녀들과 같이 어울렸었다. 나와 가까웠던 몇몇 사람들은 내가 그 그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같이 어울리는걸 못마땅해 했었지만, 난 나와 아주 다른 사람들과 한번 어울려보고 싶은 호기심에 그런 말들을 무시하고 계속 어울렸다.

결과적으로 그녀들은 나와는 아아아주 다른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끝은 아주 안좋게 끝났다. 세대차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여자들끼리의 시샘과 신경전, 계략들과  뒷담화. 내가 생각하는 “우정”과는 너무나 다른 “우정”의 definition을 가진 그녀들과의 헤어짐은 언제간 일어날게 뻔한것 이었겠으나, 순진했지만 또 나이브했던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그 이후로 난 남친 없는 여자들로만 꽁꽁 뭉친 그룹은 좀 경계하는 편이다. 풉.

그떄 생긴 버릇일까. 아니, 원래의 내 성격이겠다만. 난 어느 순간부터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안보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생각이야 다 다르겠다만은, 그리고 그건 아주 당연한 거겠다만은, 아주 기본적인 value system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못 어울린다는걸 깨닳았기 떄문이다. 끼리끼리 논다? 햐. 옛날 어르신들 진짜 똑똑해 그러고보면. 보고싶은 사람만 보고 살기에도 이렇게 시간이 없는데 왜 내가 보기 싫은 사람들과 보대끼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해? 상식이 안 통하는데 풀긴 뭘 풀어? 그냥 서로 안보면 편한것을. 그래서 난 인정사정없이 목을 댕강 잘라내는 망나니처럼 사람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 일을 아주 잘한다. 냉정하게.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아무 문제 없이. 내가 사람들과의 문제점들을 굳이 풀려고 하지 않고 그냥 묻어둘려고 했던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한두번의 대화로 쉽게 풀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고, 난 이미 상처를 받았고, 혼란스러웠고, 또 뭔가를 누구에게 설명을 해야 한다는게 귀찮고, 힘들고, 그냥 하기 싫었다. 정말, 누군가에게 내 입장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구차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그것이 한때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더.

딱 일주일 사이에 네 사람이 나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어느날 한 사람은 내 집 문앞에 와서 문을 두들겼고, 그 다음날 한 사람은 문자와 전화 메세지를 남겼고, 그 다음날 한 사람은 이메일을 보냈고, 그 다음날 한 사람은 내가 하지도 않는 페이스북을 통해 메세지를 보냈다. 딱 폭탄맞은 기분이었고 심적으로 너무 힘든 일주일이었다. 아, 물론 지금도 많이 힘들다. 나를 다시 찾는 그 사람들이 딱히 고맙지도 않을만큼.

이메일과 페이스북은 아직 손도 못댔고, 집에 찾아온 사람과 전화한 사람과는 대화를 했다. 대화를 하고 또 했다. 설명 하고. 설명 듣고. 또 설명 하고. 또 설명 듣고. 다른날 또 대화를 했다. 한번 대화 할때마다 힘이 쪼옥 빠진다. 그냥, 다 집어치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 또 숨고 싶고 또 피해버리고 싶다. 그 설명해야 함의 구차함이 너무 비참하다.

그러면서 참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다. 한번 비틀어진 관계는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걸 알기에.

여태껏 내가 잘라냈던 사람들과 다시 화해를 한적이 없다. 그래서 화해란 것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좋다. 오해들을 풀고 화해란걸 한다 치자. 결국 입장차이 아니던가. 이해했다 치자. 그럼 그 다음은? 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하게 지내? 분명 내 속에선 뭔가가 바뀌었는데? 그럼 내가 왜 그런 가식적인 관계를 이어가야 하지? 그런건 사회생활에서도 충분히 하는데?

입장의 차이를 이해했는데도 내 마음이 예전같지 않다는건 내가 소인배여서인가. Forgive & forget 하지 못하는 이유는 뒷끝이 많은 나의 쪼잔한 인품때문인가. 화해의 손을 반갑게 맞이 못하는건 나의 쥐똥만한 그릇때문인가.

모든 문제는 대화로 푸는게 답이란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식이 옳은 방식이 아니란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내가 제일 쉽게 할수 있는 방식이었고 여태껏 날 편안하게 만들어준 유일한 방식이었다.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하는 요즘. 내 자신과 내가 여태껏 해왔던 인간관계 방식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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