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뭘 쓰고는 싶은데 딱히 쓸건 없고 해서, 좀 지나긴 했지만 나에겐 재미있었던, 그래서 블로그에 쓸려고 했었지만 그 타이밍을 놓쳐서 지나쳐버린, 그런 일에 대해 쓰고자 한다.
가만 있자… 이게 한 두어달 됐나? 남자의 10년지기 이성 친구가 있는데 결혼을 한댄다. 난 그녀를 딱 한번 본적이 있는데 나도 같이 오라고 했다네. 두시간정도 운전해서 가야 하는 필라델피아. 남 결혼 하는데 내가 예쁘게 하고 갈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오랜만에 참석하는 결혼식이니 난 드레스도 입고, 분도 톡톡 열심히 바르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에 힘도 좀 주는등 나름 꽃단장을 열심히 하고는 딴엔 예쁘게 하고 갔다 (이거슨 물론 내생각).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많이 했다. 나야 뭐, 거기에 아무도 모르지. 그렇게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남자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데 저쪽에서 어떤 여자가 이쪽을 자꾸 흘끔흘끔 쳐다본다. 한 세살이나 네살정도쯤 된, 아들인듯한 남자 어린애와 앉아 있는 내 또래의 여자. 그거 있잖아 왜. 딴에는 몰래 쳐다보는것 같은데 이쪽에서는 다 느껴지는거. 암튼 한참동안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러고는 너무나도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대고 악수까지 청하며. 난 얼떨결에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한다 (속으로는, 이 여자는 왜 자기 얼굴을 이렇게 내 얼굴 가까이 갖다 댈까 하는 생각). 그러더니 내 이름을 묻는다. 그래서 난 또 얼떨결에 내 이름을 말해준다 (속으로는, 이 여자는 왜 내 이름을 묻지란 생각과, 자기 이름부터 말하고 내 이름을 묻는게 순서인데 하는 생각. 결국 자기 이름은 말을 안함). 하지만 뭐, 그럴수도 있지 하며 별일 아니라 여긴다. 그녀는 나한테 인사를 다 한 뒤에야 남자와 인사를 한다. 오빠 그동안 잘 있었어? 응, 너는? 나야 잘 지내지 뭐. 남편은 안왔어? 응, 시합이 있어서 못왔어. 그렇게 간단한 안부를 묻고 대답하다가 간다.
저 여자는 누구야? 아, 결혼하는 친구랑 룸메이트를 오래 한 애야. 10년동안 룸메이트 하다가 LA로 시집갔어. 그렇구나, 결혼식 참석하러 서부 끝에서 동부 끝으로 왔으니 참 멀리서도 왔네.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데 시합이 있대? 태권도 사범. 그래?
잠깐동안 난 별 생각이 없다. 근데 어, 이상하다? 신부랑 오랫동안 룸메이트 하다가 태권도 사범을 만나 LA로 시집간 여자. 나 이거 분명히 아는 스토리인데. 누구더라? 그러고는 몇초 후에 깨닳는다. 그녀가 바로 그가 5년동안 사귄 여자친구였다는 것을. 결혼까지 생각하고 만났었는데, 그래서 남자는 공부가 다 끝나고도 한국에 안 돌아가고 여기서 일을 하며 그녀의 공부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자기는 공부가 더 하고 싶다며 헤어지자고 했다던 그녀.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남자와 태권도 사범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태권도 사범이 LA로 이사가자 그와 결혼하러 그쪽으로 떠난거라 한다. 그녀가 그때 태권도 사범과 불타는 사랑에 빠져서 그랬던 아님 현실적으로 생각했을때 태권도 사범이 더 낳은 신랑감이여서 그랬던, 어쨌거나 저쨌거나, 남자와 그녀는 결혼할 인연은 아니었기에 안된거겠지만, 믿고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느낀 배신감으로 남자는 충격을 크게 먹었었고 오랜 시간 방황을 했었다 했다. 근데 그 여자가 그 여자였던 것이었다. 빙고.
저 여자가 그 여자지? 어… 어떻게 알았어? 눈치 되게 빠르네. 참 내, 내가 아는 여자중에 LA에 있는 태권도 사범이랑 결혼한 여자는 저 여자밖에 없거든요? 근데, 저여자 여기 오는거 알았어? 아니, 나도 재가 LA에서 여기까지 올꺼라고는 생각 못했어. 그렇구만. 근데 저 여자 왜 저렇게 오바해서 인사해? 아, 재가 원래 좀 오바하는게 있어.
난 우선 그 상황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생각지도 못한데서 남자의 옛애인을 만난 상황이라니. 그녀는 여자인 내가 봐도 괜찮은 여자였다. 괜찮은 얼굴에, 괜찮은 몸매에, 성격도 괜찮아 보이는. 나이도 (나중에 알고보니 하필이면) 나랑 동갑인데, 애를 안고 있어서 그랬지, 혼자 있었으면 아가씨로도 보였을것 같다. 그러니깐, 이 와중에도, 그녀가 내 눈에 괜찮아 보였다는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다행이었던건, 내가 그때 민낯에 꼬질꼬질한 츄리닝 차림이 아닌 나름 예쁘게 하고 있던 상황이라는거지. 오 하느님 땡큐베리캄사. 하지만 딱 하나 기분이 좀 거시기 했던건, 그녀가 나한테 인사하러 왔을때 나만 그녀가 그녀인걸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뭐, 그렇다고 그때 남자가 나를 툭툭치며 “얘가 걔야” 하기도 웃긴 상황인거고, 그녀가 직접 “제가 걔예요” 하기도 웃긴 상황인거고. 나야 어쨋거나 저쨋거나 나중에라도 알게될 사실이었겠다만, 암튼, 그 인사하는 순간,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에 기분이 쪼오끔 거시기했다. 거기다가 그녀의 행동들을 100% 이해 못하겠는것도 좀 기분을 거시기하게 만들었던것 같다. 그러니깐, 나같으면 흘끔흘끔 쳐다는 봤었어도 차마 가서 인사는 안했을것 같거든. 하지만 뭐, 사람은 다 다르니까.
남자는 어땠을까? 우선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결혼식에 와서 좀 당황했었겠지. 나에게 와서 인사를 너무나도 친절하게 하니 그 모습이 또 당황스러웠을테고. 그는 내 옆에서 나에게 음료수나 음식을 열심히 갖다 나르고 내 옆을 한시도 안 떠나는등 지속적인 배려를 해주긴 했다만, 속으로는 분명 그녀와의 옛날 일들이 소록소록 생각이 났을테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러면서 그때의 감정들도 다 되살아 났을텐데 나한테 티 안내며 감정을 숨기느라 고생좀 했을거다. 참고로 그는 그시간 내내 엎드려 뻗쳐를 시키면 할것같을 정도로 나에게 열심히 충성을 다했고, 내가 식사 테이블 옆자리에 앉은 처음보는 언니들과 이것저것 수다를 떨 동안에는 열심히 자신의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ㅋ
여자는 어땠을까? 남자가 신부와 친한 이성친구이다보니 결혼식에 올꺼란걸 알았을테고, 좀 비싸보이는 검정 드레스에 좀 과도한 굽의 빤짝이 구두를 신은걸 보니 나름 신경쓰고 온듯하다. 물론 결혼식이니까 신경을 쓴것도 있겠다만, 내가 여자여서 아는데 말이지, 나도 내 ex가 오는줄 알았다면 신경쓰고 갔을꺼다. 뭐, 이거야 너무나도 당연한 여자심리. 암튼 그런데 자신이 과거에 한 일이 있단 말이지. 그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한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그래서 분명히 남자한테 미안한 맘이 있었을꺼다. 근데 옆에 여자를 하나 끼고 왔네? 좀 괜찮아 보이는? (다시 한번, 이거슨 물론 내생각). 자신이 차고 간 남자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은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미안함을 좀 덜어주고, 비록 옛 애인이지만 그도 잘 지내고 있는것 같아 기쁜 마음도 들었을꺼다. 하지만 내가 버린 남자 옆에 괜찮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좀 혼란스러울것 같기도 하다. 왠지 내가 그때 내린 결정이 잘 내린 결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것 같은. 내가 저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지금은 어땠을까 하는. 옛 생각이 나서였는지 그 여자는 결혼식 내내 굉장히 감정적으로 있었던것 같다. 피로연에서 제일 친한 친구로서 한마디 하는 시간에 그녀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울었는데, 10년 룸메이트가 결혼한다는 기쁨이 그렇게 심하게 울게 만들진 않거든. 이것도 물론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여러가지의 미묘한 감정들을 느끼다 온 시간이었다. 나와 그녀가 느꼈을 여자들의 보이지 않는 심리와 남자가 느꼈을 심정들을 생각하느라 재미있기도 했지만, 또 그 여자와 이 남자 둘 사이의 빗겨간 인연과 그들의 생각지 못했던 해후가 씁쓸했다고나 할까. 생각같아선 둘에게 나가서 못다한 얘기나 좀 하고 오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건 또 내쪽에서의 오바라 가만히 있었다. 집으로 오던 길에는 내가 참석했던 다른 한 결혼식이 생각이 났다. 날 버린 남자가 그의 못생긴 새 여친과 있던 자리에 내가 잘생긴 새 남친을 데리고 가서 서로를 봤던 날. 그날도 참 흥미로운 날이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