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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the ‘옛날 옛날에’ Category

오… 오랜만에 들어오니 워드프레스도 많이 바꼈네… 오…

짧은 글이라도 좀 꾸준히 써보자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이거이 이거이 대따 어색하구만. 맨날 생각만 하고 메모만 해두면 뭐하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목걸이가 되던가 팔찌가 되던가 할꺼아녀. 아 쫌!

암튼… 방금 내 시스터와 통화를 했다. 그리고 어카운트는 만들었지만 하지는 않는 페북에 들어가 서치를 열심히 했다. 그리도 지금 나는 멍하다. ㅋ

내 시스터의 첫사랑은 세바스띠안 XX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남자애였다. 우리는 그때 세꾼다리오 3학년이었으니 한국으로 치면 고1이였고, 그는 한 학년 위인 4학년이었다. 내 시스터의 첫사랑은 그때 시작해 다음해까지 이어졌고, 결국 그 다음해 그가 졸업을 하며 학교를 떠나자 내 시스터의 첫사랑은 끝났다.

아. 참고로 그녀의 첫사랑은 진짜 사귄게 아니라 짝사랑이다. ㅋ

하지만 아주 짝사랑만은 아니었다. 그도 알고 있었건든. 그리고 그의 친구들도 다 알고 있었거든. 내 시스터가 그 무리들을 새빨간 얼굴로 지나갈때면 그의 친구들은 그녀의 길을 막으며 못지나가게 했었고, 그럼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보던 그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었다. 아 다시 생각만 해도 풋풋하네. 이것봐. 우리도 수지만큼 풋풋했다고!

그는 우윳빛깔의 새하하하얀 얼굴에 아주 부드러운 연한 갈색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러운 곱슬에. 눈도 부드러운 갈색이었던것 같다. (참고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유럽사람들처럼 생겼음). 그는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고 또 좀 마른 편이어서 소년같은 스타일이었다. 그는 쉬는 시간에 그의 클래스룸 밖의 복도에 친구들과 서있곤 했는데, 항상 벽에 등을 기대어 서있던 그는 한쪽 다리를 접어 발로 벽을 밀고 서있곤 했다. 햇볕을 받으면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은 더욱 더 부드러운 색깔을 띄었었고 빛이 났었다. 그렇게 그는 부드러운 커피우유같은 남자애로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내가 이렇게 쓰니까 꼭 내 얘기 하는것 같은데, 절대 아니오. 난 그냥 그 시간들의 산 증인일 뿐이오. 왜냐. 내 시스터가 멀리서 그를 체키라웃할때면 항상 내가 먼저 체키라웃을 해줬으니까. 또 그 복도 앞을 지날때면 내 시스터는 나의 팔을 꼭 쥐고는 내 등뒤로 빨개진 얼굴을 감추곤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시스터보다도 내가 더 그를 많이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암튼 내 기억에 너무 선명한 그다.

그리고 조금전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페북에 들어갈 있이 있었댄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생각이 났댔다. 그래서 서치를 해봤댄다. 그랚더니 역시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는거지. 첫번째로 딱 뜨더랜다. 헉.

전화를 끊고 페북에 들어가 확인했다.

난 그를 못알아봤다. 그녀가 그를 어떻게 알아봤는지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나이를 먹었고, 살이 (굉장히) 많이 쩠고, 덥수룩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아저씨가 되있었다. 와이프와 애들 둘이 보였는데, 내가 그를 알아봤던 유일한 이유는 그 아이들에게서 그때 그의 모습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다시 했다. 그녀는 충격을 많이 받은듯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의 얘기를 가끔씩 했었다. 그만큼 그는 항상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아름답고 풋풋한 첫사랑이었는데, 그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렇게 쉽게 페북에서 찾은것 등등 복합적인 충격인듯 했다. 실망보다는 복합적이었으리라. 그래도 어렸을때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하는걸 보면. 난 하나도 못찻겠더구만.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이 교훈을 떠올려야 한다.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둘것. ㅋ

그리도 이제 내가 왜 지금 멍한지를 얘기해 주겠다.

전화를 끊고는, 그래? 그렇게 페북에서 사람 찾기가 쉬워? 그러며 나도 갑자기 이사람 저사람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헉… 나의 첫사랑은 아니지만 내 연애사에서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의 사진을 다른 사람의 페북에서 우연히 본것이다.

나는 연애할때 항상 모든걸 다 쏟아부어 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끝나면 후회도 없었고, 미련도 없었고, 친구로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어디 연애할때의 이별이 아름답던가. 좋게 끝난다는게 있기나 하던가. 난 아직도 옛애인은 생판 모르는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데 그는 많은 시간이 흐른후 내 연애사의 익셉션으로 남았으니, 바로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이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그와의 기억은 좋게 남았을뿐. 다른 놈들과는 달리 잘 살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것뿐. 가끔 생각나며 결혼은 했나, 애들은 있나, 쪼오끔 궁금할뿐. 그리고 그때 우리 참 좋았어 하고 미소 지을수 있을뿐.

그런데… 내 연애사에 굵은 획을 그으며 익셉견을 만들어낸 그의 이름이 생각이 안난다! 진짜로!

어려운 한국이름도 아니고 영어 이름인데. 몇개 하다보면 하나 걸릴만도 한데. 근데 아예 모르겠다. 와… 이거… 내일이면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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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맴버로 있는 산악회의 회원중에 우주/과학/철학, 뭐 이런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책도 많이 읽는 분이 계신다. 그분이 책을 읽고 가끔씩 짧은 글을 산악회 싸이트에 올리시는데, 요번에 별에 관한 글을 읽고 새삼 잊어버리고 있던게 생각이 났다. 우리가 지금 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지금 현재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별빛이 그 별을 떠났던 때에 그 곳에 있었을 뿐이라는거. 그 별이 지금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는 모른다는거. 갑자기 그 스케일의 광할함에 뭔지 모를 아득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분명 어렸을때 과학시간에 배운듯한 이 기본상식을 그동안 까막득히 잊어먹고 있었음에 또 아득함을 느꼈지만.

우리 큰집은 강원도에 있는 연곡 해수욕장에 있다. 강원도 강릉시 어쩌구 저쩌구 산 3번지로 끝나는 주소를 가진 그 집은 그때만해도 아궁이 위에 올려놓은 큰 솟에다 밥을 짓는 시골에 있었다. 큰집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개인적으로는 한번도 뵌적이 없는 울 아빠의 형네 집이어서 큰엄마는 홀시어머니와 (나의 친할머니) 든든한 아들 셋과 함께 그 시골에서 살고 계셨다. 자주는 못가더라도 몇년에 한번씩은 여름 바캉스때 갔었던것 같은데, 그곳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딱 한국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갔던 때의 기억이다. 내가 한국을 1989년도에 떠났는데 마지막으로 큰집에 갔을때가 겨울이었으니, 이건 아마도 1988년도 겨울의 이야기일 것이다. 

큰집 아들 셋중에 막내 아들은 제일 싹싹하고 우리와 제일 나이 차이가 없는터라 우리와 잘 놀아 주었었다. 그때 큰엄마는 시내쪽으로 일을 다니셨나보다. 저녁인지 밤인지 해가 지자 온 사방이 깜깜했던 그 시각에, 일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마중나가자며 막내오빠는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깜깜한 시골에서 아무것도 할일이 없어 심심해했을 우리기에 좋다구나 따라나갔을꺼다. 그리고는 그는 우리들을 리어커에 태웠다. 큰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리는 정류장이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나본데, 효자 막내아들이 어머니의 피곤함을 좀 덜어드리고자 매일밤 어머니를 리어카에 실어 집으로 데리고 왔던 모양이다.

온 사방이 깜깜했다. 옆의 사람은커녕 내 눈앞에 댄 내 자신의 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같은 어둠이란게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리라. 완벽한 까만색이 참 깨끗한 색이란걸 그때 느꼈던것 같다. 그 완벽한 어둠속에서, 우리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대한 무서움과 설레임과 긴장감과 호기심으로 꺄르르 웃어댔던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우리에게 리어커 둘레에 있던 손잡이를 꼭 잡으라고 했다. 떨어지면 안된다고 하면서. 그리고선 그는 리어커와 함께 막 뛰기 시작했다. 안떨어 지겠다고 손잡이를 꼬옥 잡은 손은 쥐가 날 지경이고, 땅의 울퉁불퉁함 때문에 들썩들썩대던 엉덩이는 멍이 들 지경인데, 덜컹 덜컹 빠르게 움직이는 그 리어커 속에서, 정말 아무것도 안보이던 그 어둠 속에서, 난 그가 어떻게 달릴수 있었는지가 너무 너무 신기했다. 그 신기함은 경의로움에 가까워서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수도 있다는 불안감마저도 사그러지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우리보고 하늘을 보라 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밤하늘. 난 고개를 뒤로 젗히는 순간 숨이 콱 막혔던것을 기억한다.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밤하늘. 하늘과 나 사이, 그 거리의 가까움에 너무 놀랐었다. 내 눈앞의 손조차도 못보던 완벽한 어둠과는 너무나도 반대로, 쫘악 깔려있는 별들 때문에 까만색이 거의 보이지 않던 그 하늘은 당장이라도 내 얼굴에 닿을것 같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것 같은 그 반짝이는 것들에게 난 굳이 손을 뻗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그 반짝거리는 것들이 내 얼굴위로 우수수 쏟아질것 같았거든. 난 그토록 많은 별들을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본적이 없다. 그리고 그토록 반짝거리던 별들도 본적이 없다. 반짝반짝 작은별? 그래. 난 반짝반짝 빼고는 다른 표현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그 별들에게 “반짝반짝 거리다”라는 표현은 실례임을 안다. 고개를 젖히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덜컹덜컹 움직이는 리어커 안에서 본 그날의 밤 하늘은 완벽한 아름다움이었고, 난 그 후는 기억이 하나도 안난다. 아마도 큰엄마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 왔겠지.

아직도 가끔씩 그 하늘이 생각난다. 참 충격적이었나보다, 그때의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걸 보면. 어느날 여행하던중 유타(Utah) 주에서 딱 한번 비슷한 밤하늘을 본적이 있는데, 그땐 환한 달빛과 길가의 가로등 불빛때문에 하늘이 절대적으로 까맣게 보이지가 않았고 그래서 별빛들의 감흥도 좀 떨어졌었다. 그때도 물론 입을 멍하니 벌리고 와우 하며 하늘을 쳐다봤지만, 그러면서도 생각했었다. 난 그때 본 그런 하늘은 아마도 다시는 못볼꺼야.

어떤 기억들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손자국처럼 남는것 같다.

방금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쳐다본 하늘은 참 초라했다. 뭔가 하나가 반짝거리긴 했는데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인것 같다. 별이 보고 싶다. 인공위성들 말고 진짜 별들. 그것이 비록 지금 당장 하늘에 떠있는 별이 아니라 몇백년전에 별을 떠난 빛뿐이라 하더라도. 내 눈 바로 앞에 펼쳐지는 밤하늘이 참 욕심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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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한테서 안좋은 소식을 들었다. 스위스에 살고 있는 작은 이모가 많이 아프단다. 자세한 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대충 들은 바로는 상처를 통해 생긴 바이러스 문제인것 같다. 수간호사들 중에서도 짱먹고 있는, 그래서 수술실에서 우왕자왕하는 인턴들을 쪼오끔은 얕보고 있는 울 작은 이모는, 병원에 안가고 혼자 집에서 소독하고 치료하다가 나름 병을 키웠나보다. 지금 수술을 벌써 한번 했는데 조만간 또 한번 해야한다니 뭐가 얼마만큼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암튼 울 엄마는 이모한테 전화 한통 하라고, 조카들 목소리 들으면 힘을 내지 않겠냐고, 부탁조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울 작은 이모와 마지막으로 통화한게 지금 몇년이 됐는지 생각도 안나는 지금. 옛날에나 국제 전화비가 비싸서 못했지, 지금은 전화카드 하나 사면 충분히 얘기할것을 왜 그동안 안했나 하는 후회뿐. 

울 엄마네는 형제가 다섯이다. 원래는 일곱이었는데 전쟁통에 하나는 고구마 먹다가, 또 하나느 미숫가루 먹다가, 둘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남은 다섯중, 큰 이모는 첫째라 대접을 받았고, 큰 삼촌은 장남이라 대접을 받았고, 그 다음 울 엄마부터 대접을 못받고 자랐다 한다. 울 엄마 다음에 작은 삼촌과 작은 이모가 오는데, 울 엄마 말로는 둘다 자신이 업어가며 키우다시피 했단다. 그래서 울 엄마의 작은 이모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그후 70년대때쯤 한국에서는 먹고 살기 힘든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간호원으로 돈벌러 갔나본데, 울 작은 이모도 그때 그 그룹에 합류해서 독일에 갔다. 독일에서 쭉 살다가 스위스로 이사가서 산지도 꽤 됬는데 언제였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안난다. 나 아르헨티나 살때쯤인것 같은데. 그럼 한 20년 전일지도 모르겠다…

울 작은 이모는 다른집 조카들보다 우리집 조카들을 좋아했다. 어렸을때 가끔 이모가 한국에 오면 항상 좋은 선물들을 우리집 애들에게 가져왔다. 난 이모에게 받았던 스와치 시계의 디자인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나고, 수채화용 물감셋트는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헬로키티에서 나온 조그만 거울과 빛 세트는 이곳으로 이사 오기전 세살박이 내 조카에게 선물로 줬다. 내가 이십년이 넘도록 고이고이 모셔뒀던 물건이다.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그런다고 웃을수도 있겠으나, 난 진짜 엄마가 딸에게 반지를 물려주는 심정으로 그 물건을 내 조카에게 건네줬다. 나처럼 오랫동안 고이고이 간직해 주기를 맘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이모와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헤프닝이 있다.  어느날 울 엄마가 아빠 드시라고 어디서 보신탕을 조금 구해왔나 보다. 근데 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엄청나게 고기를 밝혔던 거지. 딸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입맛을 다시며 아빠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빠는 어디 너 한번 먹어봐라 했을테고, 난 맛있다 맛있다 하며 먹었나보다. 나중에 좀 커서 난 그런건 먹은적 없다고, 그런걸 어떻게 먹냐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아빠가 갑자기 어디서 쏘니 테잎 하나를 가지고 오는거야. 귀여운 딸들 노랫소리 녹음하느라 아빠가 테잎에 우리 목소리를 많이 녹음했었었다. 암튼, 아빠가 어느 부분인가 찾아서 틀어준 내용은 이랬다.

아빠: 땡땡아 땡땡아, 세상에서 제에일 맛있는게 뭐어지?

나: 개고오기!

그때가 내가 세살때였단다. 이 증거물로 인해 난 결국 보신탕 먹은게 탄로가 났고, 이걸 안 울 작은 이모가 나에겐 더이상 뽀뽀를 안해준다고 선포했고, 난 완전 엉엉 울었고. 내가 너무 서럽게 울고불고 해서 결국 이모는 나에게 더이상 보신탕을 안먹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뽀뽀를 해주는걸로 이 일은 마무리가 됐다. 이 일은 이모를 볼때마다 우리집에서 안 빠지고 나오는 레파토리다. 

울 작은 이모는 결혼을 한번도 안했다. 젊은시절 한 독일 남자와 가슴 아픈 사랑을 꽤 오랫동안 한걸 알고 있는데, 스위스로 이사간 뒤로는 연애소식을 들어 본적이 없다. 가끔 한국에 들어가서 선 같은것도 보고 했나본데, 워낙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한국에서 사는 한국 남자들과는 잘 안맞았나보다. 내가 지금 이 나이 되어보니, 또 한국 떠나 산지 오래 되다보니, 이모가 여자로서 얼마나 외롭게 살았을지 알겠어서 가슴이 많이 아프다. 그나마 젊었을땐 이것저것 배우는 재미로 살았나본데 지금은 혼자서 아픈데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몇년전, 이젠 자신은 남자에 대한 고민이 완전히 해결 됬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 하는걸 울 엄마를 통해 들었다. 지가 행복하다면 됬지 뭐 하면서도 울 엄마, 이모와 전화한 날은 시집 안간 딸들에게 제발 시집좀 가라고 성화다. 울 엄마, 꽤 open-minded 된 사람이다. 자신이 해보니 여자는 결혼하면 고생이거든? (아빠 미안!) 그래서 내가 괜히 이상한놈 만나 평생 고생하며 사느니, 능력되면 혼자 사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라고 하면 그 말에 수긍하신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작은 이모만 생각하면 결혼하라고 난리고. 본인이야 어쨌건간에 이모가 혼자 외롭게 늙는것 같아 짠한 마음에 그런거란걸 내가 왜 모를까. 그래서 그럴땐 그냥 녜, 녜 하고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또 한번 결혼이란거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몇년전에 내 쌍둥이 언니가 친구와 유럽여행을 갔었다. 나보고도 같이 가자 했었는데, 난 그때 내가 진짜 일하고 싶었던 회사에 인터뷰를 보고는 기다리던 중. 조만간 연락이 올것같아 아무데도 못갔다. 다행히 거기서 연락이 와서 일했기 망정이지, 안됬으면 정말 평생 궁시렁 궁시렁 했을꺼야. 암튼 그때 걔네는 가이드한테 잘 사바사바해서 여행을 마치고는 스위스 이모네 가서 이틀인가 묵고 왔다. 난 그때 이모에게 미안한 마음에 내가 정성스레 뜬 십자수를 하나 들려 보냈다. 가운데 십자가 모양엔 시편 23편이 글로 써있고, 네 모서리엔 평화로운 들판에서 양때를 치는 예수님 그림이 들어있는 디자인인데, 햐, 진짜, 내가 여태껏 했던 십자수중에 제일로 복잡하고 힘들었다. 일년만에 겨우 완성한 십자수인지라 아무에게도 못주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이모라면 받고 기뻐할것 같은 마음에 큰맘먹고 보냈다. 어렸을때 징징대며 울던 조카가 다 커서 이런걸 만들어서 보내오다니, 뭐 그런식의 감동을 살짝 바랬던것도 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직 소감을 못들었네 그려. 그거 진짜 눈빠져라 힘들게 한건데. 힝.

암튼 내일 당장 전화카드부터 사러가야 한다. 울 엄마 말로는 국제전화 카드는 한국에 하면 몇시간을 할것을 스위스에 하면 한 30분밖에 못한다네. 이 글로벌 시대에도 아직도 유럽쪽에 전화하는건 좀 비싼가보다. 아무튼 내일 전화해봐야 자세한걸 알겠지만… 아무쪼록 큰일이 아니기만을 바랄뿐이다. 지금 50대인 울 작은 이모는 내가 유일하게 반말하는 친척이다. 멀리 살아서, 그래서 자주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모르지만, 항상 볼때마다 내 눈엔 똑같아 보이는 울 작은 이모. 갑자기 그녀 특유의 엑센트가 섞인 한국말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일 전화해서 마치 몇일전에 본냥 어색하지 않게, 반말로, 크게 웃으면서, 그동안 잘 지냈냐고, 다 괜찮을꺼라고, 걱정말라고, 조만간 함 놀러 가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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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분이 좀 그렇다. 아직까지도 건조한 날씨에 더 익숙해서일까. 온몸으로 느껴지는 끈적끈적함이 불쾌하다기보단 당황스럽다. 저번 여름은  어땠었지 하고 생각해보면 도통 기억이 안나고. 하긴, 생각해보면 뭘해. 당연히 더웠겠지. 그리고 요번 여름도 아 더워, 아 더워 하다가 어느 순간 지나가 있겠지.

지금 내 집은 휑하다. 엿바꿔 먹을려고 가구들을 헐값에 다 팔아먹었다. 카우치는 친구가 자기 언니네 준다고 샀고, TV와 받침대는 자메이카에서 온 나탈리라는 회사 동료한테 팔았고, 테이블과 의자들은 퀸즈에 사는 어떤 한국 유학생에게 팔았고, 커피 테이블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도 부부에게 팔았다. 그러고보니 나 한 세일즈 하네. 예전에 사람들이 난 뭐든지 잘 팔것 같다고 해보라고 해보라고 해서 부동산 중계업자 자격증을 땄었는데, 집 딱 하나 팔아보고선 관뒀다. 적성에 안맞아서. 더 솔직하게는 세일즈란거 자체가 하기 싫어서.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일은, 이 일을 언제까지 해주시요 하고는 아무 간섭 없이 나혼자 하게끔 내버려 두는 일. 할말들은 이메일로 하고. 근데 사람들은 나를 정반대로만 봐주니 난 어쩔수 없는 이중인격자.  

암튼, 이사 갈때까지 안팔리면 어떻하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시간을 맞춰 다 팔아서 다행이다. 다들 깎을 생각도 안하고 금방 집어가는걸 보니 너무 싸게 내놨나, 조금 더 부를껄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쪼오끔 있지만 뭐, 내가 이걸로 한몪 제대로 챙길려고 한것도 아니고 말이지. 어차피 싸게 내놓아서 빨리 팔려는게 목적이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그냥 가져간 사람들이 유용하게, 오랫동안 써줬으면 할뿐이다. 문제는 당장 난 밥 먹을데도 없다는 거. 지금 난 침대에 거꾸로 누워, 이삿짐 싸놓은 상자 하나를 침대 끄트머리에 붙혀놓고, 그 위에 랩탑을 올려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다행히 높이가 대충 맞는다. 당분간은 이 상자가 내 책상이요 밥상이겠구나.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거지 뭐.

이 집에 처음 왔을때가 기억난다. 그때 난 이곳으로 이사 오기전 살던 곳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오고 싶었던 나는, 그래서 그날 아무데나라도 계약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나는, 이 아파트의 창문들을 보고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마루바닥에 비치던 환했던 햇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그때의 눈부심. 그 눈부심은 나에겐 희망이었다.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생길꺼라는. 

이사 와서는 난생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새가 나뭇가지들을 주워다가 열심히 둥지를 꾸미는것처럼 나도 그렇게 열심히 내 둥지를 꾸몄다. 혼자서 무거운 가구들 위치를 바꿔보겠다고 한밤중에 끙끙대며 옮겨도 보고, 내가 십자수 떠서 넣어놓은 액자들을 어디에 걸까 몇날 몇일을 고민하고. 남의 집에 가면 항상 화장실을 주의깊게 보는 나는 수건 한장을 살때도 고민을 하며 샀고, 결국 선반까지 사서 수건들을 곱게 개어 놓고는 잡지에 나오는 화장실 같다며 혼자 만족해 했다. 심지어 난 냉장고 속까지도 내가 원하는 식으로 물건들을 놓으며 그렇게 내 마음대로 물건들의 자리를 일일히 정해주었다. 오래된 빌딩의, 보통의 화장실을 가진 이 코딱지만한 스튜디오는 그렇게 나에겐 꿈과, 희망과, 자유의, 그리고 나.만.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잠깐동안은 좋았었다. 아니, 행복했다. 그 망할놈의 50대 아저씨가 일터에서 날 따라다니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누가 날 보는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면 그곳엔 꼭 그의 끈적거리는 눈길이 날 쫓아다니고 있었다. 눈길로 날 벗기는듯한 느낌. 성희롱은 아니기에 괜히 오버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나는 할수없이 슬슬 숨어다니기 시작했다. 점점 커져가는 화남.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안좋은 기억들. 서로 상관은 없는 일들이다. 하지만 둘다 비슷하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두달동안 숨어지내다가 어느날 난 그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왜 나랑 얘기하지 않냐, 왜 나를 피하냐, 난 너때문에 요즘에 잠도 못자고 있다, 제발 그 이유를 말해달라, 그런 내용의. 그의 오피스로 갔다간 내가 후회할 짓을 할것만 같아 난 이성을 잃지 안을려고 내자신을 다잡으며 내 보스의 오피스로 갔다. 난 내 보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고, 보스의 도움으로 그에게 짧은 이메일을 보냈고, 그 후로는 그가 날 피해다닌다. 아직까지도. 이 얘기는 그냥 여기서 끝나는 얘기고, 어찌보면 일터에서 충분히 일어날수 있는 헤프닝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난 깨닳았다. 나만의 보금자리를 가지면 모든게 나아질꺼라는 생각은 헛된 생각이었다는걸. 내가 받았던 고통이 그냥 안좋은 기억으로 남은게 아니라 상처로 남았다는걸. 어쩌면 앞으로도 난 평생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살꺼라는 걸.

그리고 작년 겨울은 내 자신의 병신스러움을 한탄하며 참 우울하게 보냈다.   

난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이사를 또 한다. 여기저기 쌓아놓은 박스들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나만의 보금자리를 떠나려니 섭섭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냈던 우울한 시간들로부터 떠나는것 같아 시원하기도 하다. 난 또 이사가면 열심히 내 보금자리를 꾸미겠지. 또 내 물건들의 자리들을 일일히 정해주는라 많은 시간들을 보낼꺼다. 정리정돈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재미있는 일이기에 살짝 신도 난다. 하지만 저번 이사할때처럼 가슴이 벅차지는 희망같은건 없다. 희망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때의 절박한 심정이 아니어서려니 하는 생각에 난 희망같은걸 생각하지 않는 지금이 좋다. 아직도 풀여야 할 숙제가 나에겐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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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에 있었을때, 그러니깐 아직 초등학생 이었을때, 울 언니는 밤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곤 했었다. 그럼 난 언니 옆에 누워서 같이 듣곤 했었지. 이불을 머리까지 같이 뒤집어 쓰고는 엎드려 누운 채 머리맡에 가깝게 둔 라디오를 조용조용 듣던 시절. 어린 아이에게는 꽤 늦은 시간이었을 텐데도, 난 중간에 꾸벅꾸벅 조는 한이 있을지언정 열심히 들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나는 별밤을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내가 아리따운 아가씨 가수가 되어 별밤지기 이문세 아저씨의 게스트로 초대가 되었다던지, 나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와 우리반 아이들이 내가 가수가 됬다는걸 알았다던지 (상상이므로 시간계념 같은건 없었음). 그땐 가수들이 노래를 하면 그들의 숨소리까지 다 들렸었는데, 밤에 조용조용 듣던 나같은 청취자들을 위해 난 내가 나가서 노래를 할땐 좀 조용한 노래로 살살 불러야 겠다라는 결심까지 했었다. 혼자 김칫국을 벌컥벌컥 들여마시고 있있던거지.

난 진짜 내가 가수가 되서 평생 노래하며 살줄 알았다. 내가 스무살때 엄마한테 혼자 한국가서 가수하겠다고 했을때 처음엔 웃던 엄마가 나중에 내가 심각하다는걸 알아채리고는 몇날몇일 날 설득시켜서 한국 못 나가게 했을때 까지는. 그때 울 엄마 말씀하시길, 네가 돈이 있냐 빽이 있냐, 그것도 다 돈이랑 빽이랑 있어야 하는거다, 괜히 가서 직싸게 고생하며 허송세월 하지 말고 여기서 공부나 해라. 내 기억에 울 엄마는 그때 좀 당황도 했거니와 나한테 미안해 했던것도 같다. 난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항상 가수 할거라고 했었는데, 내가 아직도 그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거에 대해 당황했을 테고, 딸이 하고 싶은게 있다는데 못 도와줘서 미안했을 테고. 뭐, 할수 없지, 이미 지난 일인걸. 난 그냥 그때 한국에 나가서 되던 말던 한번 시도조차 못해본걸 아직도 후회하며 살뿐.   

팝송에 대해 쓸려다가 이렇게 또 서두가 기네. 아무튼 그때 라디오에서 유명한 팝송들도 많이 들려줬었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나는 어느 나라 노래던 다 따라부르고 싶어했고, 음이야 몇번 들으면 다 알겠는데, 당최 가사를 몰라서 못따라 부르겠는거야. 응응, 흠흠, 랄라로만 끝까지 부를순 없잖아, 뽀다구 안나게. 그래서 그때 어린아이들이 많이 했듯, 한국말로 발음 들리는데로 적어서 외우곤 했다. 그거, 쉬운일 아니다? 우선 라디오에서 그 노래 나올때까지 기다렸다가 테잎에 녹음해야지, 그 다음 플레이 스탑 플레이 스탑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적어야지, 그 다음 종이 가지고 다니면서 딸딸 외워야지. 그렇게 나는 그 시절, 마이 네임 이즈 땡땡도 모르적에 벌써 팝송을 불렀다 이거야. 나중에 미국 와서, 그것도 영어가 어느정도 된 후에, 그때 들었던 노래들이 라디오에서 나오면 귀 귀울여 가사를 들었었는데, 우선 영어가 귀에 들리고 무슨 소리인지도 알아들으니 신기하기도 했거니와, 그 가사들의 뜻을 알고서는 꽤 큰 충격에 빠지곤 했었다. 특히 빌리 진. 그리고 보헤미안 렙소디. 젠장, 가사가 이런거였어? 헐.

그리다가 오늘 오랜만에 라디오에서 BoyzIImen 버젼의 “Yesterday”를 들었다. 이것도 그땐 무슨 뜻의 노래인지도 몰랐었지. 그냥 울 엄마가 많이 좋아해서 외워서 불러줬었다. 나중에 이 노래의 가사를 알았을때는 아직 나이가 어렸었는지 그 뜻을 이해 못 했었는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왜 이노래가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알겠다. 참 아름다운 노래다. 하지만 참 쓸쓸한 노래다. 아름답긴 한데 너무 쓸쓸해서 싫다. 솔직히는 아야 소리도 못하게 정곡이 찔리는 기분이 싫은것 같기도 하고.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eve in yesterday.

Suddenly,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Oh, yesterday came suddenly.

Why she
Had to go I don’t know, she wouldn’t say.
I said,
Something wrong, now I long for yesterday.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Now I need a place to hide away,
Oh, I believe in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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